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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로153길 17 (신사동 558-6)



2023 Essay

Fasickness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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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은 아름다운 연애 소설이다. 낡은 문고판을 책장에서 꺼낼 때마다 거기 담겨있는 것을 생각하면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을 좋아하는데 그린이 선택한 서두의 인용구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장소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 19세기 에세이스트 레옹 블루아의 말이다. 소설을 덮고 나면 그레이엄 그린은 제도가 허락하지 않는 주인공의 사랑을 블루아가 말한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대입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블루아의 문장이 내게 즉각적 설득력을 발휘한 까닭은 무엇보다 인간이 느끼는 지복(至福)의 상태를 감정 대신 하나의 장소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흔히 인생의 동력으로 꼽히는 사랑과 성취욕, 소유욕 등도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영혼에 딱 들어맞는 지상의 한 장소를 찾아 헤매는 갈망이라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도 게자리 아래 태어난 갑각류 인간답게 집과 머무르는 장소에 크게 연연하고 쉽게 영향받는다. 세상 돌아가는 박자에 그럴싸하게 맞춰 기능하기 때문에 들키지 않지만, 평생 여기 아닌 다른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불안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있어 매우 드물게 이는 여행 욕구는 움직임에 대한 외향적 갈망이라기보다 먼 곳에 임시로 방을 만들고 싶은 충동에 가깝다. 침체한 삶을 들어 올리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외딴 섬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침에 다른 벽지를 보며 눈 뜨고 낯선 지하철 노선도를 익히는 경험만으로도 심박수가 치솟는 역치 낮은 사람으로선 경외스러울 따름이다. 극한 조건에 육체와 정신을 부딪쳐 나란 인간이 어떤 물질로 이뤄져 있는지 냉철히 감식해 보려는 여행자들은 얼마나 강직한가! 하지만 밤낮없이 뭐 좀 쓸 것 없나 내면을 헤집는 직업을 갖고 살아온 –본인의 제조성분을 징그럽게 잘 아는-자에게, 멀리 가는 여행은 오히려 성가신 ‘나’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데에 효용이 있다. 다행히도 여행은 외향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은 ‘바깥’에 숨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다. 현지 사회를 지탱하고 재생산할 의무를 면제받는 여행자들은 한시적으로 미숙하고 방탕할 자격을 얻는다.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異邦)에서 나는 은폐하는 노력조차 없이 비밀스러워질 수 있으며, 군중의 표정에 숨은 근심을 일일이 해독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광장을 가로지를 수 있다. 서투른 나머지 현지 주민에게 어떤 끈도 지렛대도 부착되지 않은 도움을 받고, 나 역시 여생을 친절한 이웃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안전지대로부터 우리를 끌어내는 미지에 대한 향수는 생존에 불리한 충동이다. 고향을 떠나가면 우리는 쉽사리 길을 잃고 시행착오는 디폴트가 된다. 초행인 이방이나 지적으로 생경한 분야에 발을 들일 때 우리는 평소만한 ‘시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이방의 풍경은 영화로 치면 삼각대의 고정된 시점과 딥포커스를 거부한다. 마치 근시와 난시의 비전처럼 모호한 여행자의 지각은, 최대한 대상에 접근해 정체를 파악하고 파헤치려는 과학의 시선이 아니라 불안과 불확실성을 필연적으로 수용하는 예술의 그것을 닮았다. 붓과 밀대에 쓸려나가 이목구비를 잃어버린,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인물과 풍경이 발하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 거기에 깃든다.
  머나먼 곳,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인간이 가족과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신앙을 가질 이유는 줄어들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영혼의 마지막 거처는 자아임을 깨달은 사람 중 재능있는 자들이 무(無)로부터 지어 올리는, 세상에 없던 ‘장소’가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미지에 대한 향수가 없다면 인간은 시를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여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부질없는 행위를 하는 생명체는 인간 말고는 달리 없다. 보이지 않는 장소를 향한 헛된 그리움. 이것이 많은 해악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인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